도토리묵
이시백
친척께서 아는 이에게 샀다는 ‘진짜순정참’ 국산 도토리 가루를 나눠주었다. 진짜 국산 도토리라니 큰 기대를 하고 묵을 쑤었다. 묵은 그런대로 찰지기는 했지만, 전분을 섞은 듯 배틀한 도토리 맛이 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친척이 곧바로 ‘진짜순정참’ 국산판을 팔았던 이에게 이의를 제기했더니, ‘요즘 한국 도토리가 얼마나 귀한 데 백 퍼센트 국산을 쓰느냐’고 외려 목소리를 높이더란다. 한국 도토리는 멧돼지가 다 주워 먹어서 어렵게 구해 그래도 반 이상이나 넣은 것이라 했단다.
그이 말과 달리 몇 해 전, 도토리를 주워 팔아서 유럽 여행을 다녀온 우리 동네 사람도 있었다. 이산저산 비산비야 두루 돌아다니며 주워 모은 도토리를 그이는 차도 한쪽이 벌겋도록 깔아놓고 가으내 말리는 것을 목격한 바 있었다.

도토리 / 사진출처. 픽사베이
멧돼지가 많기는 하다.
산자락에 붙은 밭인지라 각오는 했지만, 올 농사는 일찌감치 산짐승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이른 봄에 심은 감자는 밑도 들기 전에 멧돼지가 파헤쳐 구경조차 하지 못했고, 고라니가 어린 순을 잘라 먹은 고추는 여름내 비실거리더니 가을이 되어도 변변한 고추를 달지 못했다. 뒤늦게 심은 서리태는 뽕나무 등걸에 앉아 곁눈질하던 산비둘기가 파먹어 거두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뒷마당에 나가보고 깜짝 놀랐다. 발 디딜 틈 없이 마당이 마구 파헤쳐져 있었다. 어지럽게 남아 있는 발자국으로 보아 멧돼지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괘씸한 일이다. 봄부터 남의 밭을 짓뭉개놓은 걸로도 모자라 이제 마당까지 파헤쳐 뒤집어 놓다니…. 울컥 화가 치밀다가 이내 그 심사가 궁금해졌다. 온종일 뒤져 보아야 콩 한 톨 나올 게 없는 마당을 무얼 찾느라 그리 짓뭉갰을까. 심지어 밭 가장자리에 수북이 쌓인 돌무더기까지 들춰가며 샅샅이 파헤쳤다.
이웃의 말로는, 먹을 게 없자 땅을 헤쳐 지렁이나 굼벵이를 잡아먹으려고 그런 모양이라고 했다. 그런가 보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언가 석연치가 않았다. 산마다 도토리며 산밤이 여물어 툭툭 떨어져 있을 가을에, 사람 사는 집 근처로 내려와 돌무더기까지 들춰가며 벌레를 잡아먹는 궁색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내 말에 이웃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요즘 멧돼지한테 돌아갈 도토리가 어딨수?”
그러고 보니, 가을이 되면서 주변의 산마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하나 같이 큼지막한 배낭을 멘 이들은 온종일 산을 헤집고 다녔다. 해가 저물 무렵이면 어깨가 처지도록 가득 찬 배낭을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오던 모습이 생각났다.
예부터 흉년이 들면 도토리가 유난히 많이 열려 사람을 먹여 살린 구황식이 되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살이 쪄서 고민인 사람들이 줄지어 드나드는 산에서 도토리는 별식으로 털려간다. 사람에게는 도토리가 별미일지 몰라도 산에 사는 멧돼지에게는 생존이 달린 먹이이다. 도로변에 누군가 붙여 놓은 ‘도토리 팝니다.’라는 현수막이 불편하게 다가온다.
도토리묵
이시백
친척께서 아는 이에게 샀다는 ‘진짜순정참’ 국산 도토리 가루를 나눠주었다. 진짜 국산 도토리라니 큰 기대를 하고 묵을 쑤었다. 묵은 그런대로 찰지기는 했지만, 전분을 섞은 듯 배틀한 도토리 맛이 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친척이 곧바로 ‘진짜순정참’ 국산판을 팔았던 이에게 이의를 제기했더니, ‘요즘 한국 도토리가 얼마나 귀한 데 백 퍼센트 국산을 쓰느냐’고 외려 목소리를 높이더란다. 한국 도토리는 멧돼지가 다 주워 먹어서 어렵게 구해 그래도 반 이상이나 넣은 것이라 했단다.
그이 말과 달리 몇 해 전, 도토리를 주워 팔아서 유럽 여행을 다녀온 우리 동네 사람도 있었다. 이산저산 비산비야 두루 돌아다니며 주워 모은 도토리를 그이는 차도 한쪽이 벌겋도록 깔아놓고 가으내 말리는 것을 목격한 바 있었다.
도토리 / 사진출처. 픽사베이
멧돼지가 많기는 하다.
산자락에 붙은 밭인지라 각오는 했지만, 올 농사는 일찌감치 산짐승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이른 봄에 심은 감자는 밑도 들기 전에 멧돼지가 파헤쳐 구경조차 하지 못했고, 고라니가 어린 순을 잘라 먹은 고추는 여름내 비실거리더니 가을이 되어도 변변한 고추를 달지 못했다. 뒤늦게 심은 서리태는 뽕나무 등걸에 앉아 곁눈질하던 산비둘기가 파먹어 거두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뒷마당에 나가보고 깜짝 놀랐다. 발 디딜 틈 없이 마당이 마구 파헤쳐져 있었다. 어지럽게 남아 있는 발자국으로 보아 멧돼지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괘씸한 일이다. 봄부터 남의 밭을 짓뭉개놓은 걸로도 모자라 이제 마당까지 파헤쳐 뒤집어 놓다니…. 울컥 화가 치밀다가 이내 그 심사가 궁금해졌다. 온종일 뒤져 보아야 콩 한 톨 나올 게 없는 마당을 무얼 찾느라 그리 짓뭉갰을까. 심지어 밭 가장자리에 수북이 쌓인 돌무더기까지 들춰가며 샅샅이 파헤쳤다.
이웃의 말로는, 먹을 게 없자 땅을 헤쳐 지렁이나 굼벵이를 잡아먹으려고 그런 모양이라고 했다. 그런가 보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언가 석연치가 않았다. 산마다 도토리며 산밤이 여물어 툭툭 떨어져 있을 가을에, 사람 사는 집 근처로 내려와 돌무더기까지 들춰가며 벌레를 잡아먹는 궁색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내 말에 이웃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요즘 멧돼지한테 돌아갈 도토리가 어딨수?”
그러고 보니, 가을이 되면서 주변의 산마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하나 같이 큼지막한 배낭을 멘 이들은 온종일 산을 헤집고 다녔다. 해가 저물 무렵이면 어깨가 처지도록 가득 찬 배낭을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오던 모습이 생각났다.
예부터 흉년이 들면 도토리가 유난히 많이 열려 사람을 먹여 살린 구황식이 되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살이 쪄서 고민인 사람들이 줄지어 드나드는 산에서 도토리는 별식으로 털려간다. 사람에게는 도토리가 별미일지 몰라도 산에 사는 멧돼지에게는 생존이 달린 먹이이다. 도로변에 누군가 붙여 놓은 ‘도토리 팝니다.’라는 현수막이 불편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