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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지역 / 지역에서 소박하고 풍성한 식사 한 끼를 챙기는 일이 결국 평화의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음식과 지역

지역에서 소박하고 풍성한 식사 한 끼를 챙기는 일이 

결국 평화의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이무열 / 지역브랜딩 디자이너 

 

매일 먹는 음식은 위계적이면서 충분히 사회적이다. 

한 끼 1,200원 안팎인 삼각김밥부터 몇만 원, 몇십만 원, 몇백만 원의 가격표를 달고 있는 음식만으로도 음식 먹는 이의 옷과 집, 직업 등을 알 수 있다. 드라마에서도 이 모습은 여지없다. 삼각김밥의 주인공은 늘어진 어깨로 허공을 응시하며 적당히 차가워진 음식을 꼭꼭 씹다 가끔 목이 멘다. 몇백만 원짜리 초밥의 주인공은 잘 빗어 넘긴 머리와 힘이 들어간 어깨로 적당히 따듯한 음식을 여유롭게 씹는다. 삼각김밥으로 만들어지는 삶과 몇백만 원 하는 초밥으로 만들어지는 삶이 예리하게 경계 지워진다. 한 번이라도 매달 날아오는 카드 명세서와 통장 잔액을 생각하면 이 경계를 넘기는 쉽지 않다.

뉴스에서 편의점 도시락 시장이 뜨겁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입안이 까끌거린다. 미리 끌어다 쓰는 카드조차도 달랑거리는 청년과 직장인에게 편의점 도시락이 중요한 한 끼 식사로 등장한 건 2007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때이다. 당시 서울에 사는 1인 가구 청년들의 식사를 조사한 자료가 있었다. 아르바이트나 계약직에 있는 청년들의 세 끼 식사는 보통 아침을 지나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퇴근길에 편의점 도시락을 사서 집에서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눠서 먹을 때도 있다) 이렇게 식당에서조차 밀려난 사람들이 찾는 편의점 도시락은 사회경기 동향을 알아차릴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편의점 도시락은 합리적인 가격, 다른 말로 하면 싼 가격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그때그때 말해주는 중이다. 지금도 편의점 도시락은 잘 팔린다. 

 

편의점 도시락에는 음식으로써의 성분과 칼로리만 담겨 있는 게 아니다. 

시간과 공간이 음식에 들어있다. 5분의 식사와 1시간의 식사가 있고, 서서 먹거나 이동하는 식사 공간이 있고, 마천루에서 도시를 음미하는 식사 공간이 있다. 2년 전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로 죽임을 당한 김 모 씨의 가방에는 몇 끼니의 식사가 있었다. 이렇게 먹는 시간과 공간은 음식만큼이나 위계적이다. 아니 음식 곁에서 위계를 더 분명히 한다. 

 

한편으로, 먹을 수 없는(이게 음식일까. 대부분 먹을 수 없는 음식은 독이 있다.) 욕망하는 음식에 우리는 매일 포섭 당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음식 TV 프로그램과 유튜브 채널에 나오는 음식과 자신의 한 끼를 비교하며 추락하고 그 식탁에 앉기 위해 파우스트가 만난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거래한다. 그래서 음식은 욕망의 상징이다. 

 

음식을 영양 도구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정치화하기를

정동 연구자 벤 하이모어는 정동 이론에서 [뒷맛이 씁쓸한 _ 정동과 음식, 사회미학]이란 이름으로 음식, 정동, 사회 미학의 관계를 풀어냈다. 서양에서 미각이 갖는 의미는 고급 감각들로 취급되는 시각, 청각, 촉각에 비해 저급한 감각으로 취급되지만, 미각은 이성주의적 규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동(Affect)1)의 필수조건으로 인정한다. 음식은 다른 감각 이상으로 몸(표면과 내부, 내장, 소화과정)에 세심하게 편성되었기 때문이다. 맛을 영어로 표현하는 Taste가 취향이 된 것부터가 신체적인 미각이 취향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한다. 한편 미각은 역겨움과 혐오, 경멸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문화가 다른 집단에서 피 지배자가 먹는 음식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취향이 된 집단적 에토스가 어떻게 배타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지를 질문하고 답하면서 보수성이 되어버린 미각(사회미학)을 되살리기 위해서 새로운 감각(미각)으로 감각중추를 굴복시키기를 제안한다. 

 

벤 하이모어의 제안대로 음식을 감각적인 소통방식으로 옮겨오면 나에게 있어서(사람들에게) 음식은 생명의 연쇄 활동으로 하나의 과정(Process)이 된다. 음식을 먹는 것은 생명의 시작이자 나를 나답게 만드는 욕망의 시원(始原)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살림은 우주와 연결된 내 마음과 몸의 관계까지도 주목하여 밥 한 그릇의 모심을 중요시한다. 밥 한 그릇을 모시는 일이 결국 평화의 삶으로 가는 길이다. 

 

음식을 시원(始原)의 생명 과정(Process)에서 작동하는 정동(Affect)으로 보면 역으로 지금 겪고 있는 기후재난과 사회재난 문제를 생명적인 투박함을 가진 음식의 정동으로 풀어볼 수도 있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일상의 따듯하고 건강한 밥 한 그릇이 가장 좋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정치가) 되는 것이다.

 

욕망의 상징으로 포섭된 음식은 헛배를 부르게 한다. 

뒤돌아서면 금방 꺼져버리는, 그래서 우리는 값비싼 레스토랑을 다녀와서도 부엌 찬장과 냉장고를 뒤진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소박하지만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밥상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몇 끼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집밥’이라는 이름이 있다. 

 

음식이 욕망의 상징에 포섭된 지금 그런 곳이 남아 있을까? 그곳이 지역이다. 결국 자연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지역은 아직 자연에서 나오는 풍성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이다. 

 

몇천 원의 집밥을 제공하는 식당은 서울에서 찾기 어렵지만 진안이나 남해, 정읍에서는 쉽게 만날 수 있다. 혼자서 밥 한 끼 해 먹기 쉽지 않은 1인 가구로 사는 사람들이 철마다 밭이나 바다에서 난 음식으로 차려진 밥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밥상을 나눌 수 있는 지역밖에 없다. 지역은 땅에서 나는 것들이 자라서 음식이 되고 그것을 다시 사람들이 나누는 곳이다. 한 끼 음식에 담긴 서사로도 마냥 행복해지는 곳이다.

더위에 미각으로 여름을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어머니의 노각무침과 호박 쌈이 그립다. 


▽ 추천

쉽게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박하고 풍성한 음식이 갖는 시간과 공간을 맛볼 수 있는 팁(Tip)이 있다. 유기농 농사를 지으면서 언제든 자연을 찾아오는 손님을 환대하는 우프코리아(wwoofkorea – 우프코리아)는 따듯한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살아있는 곳이다. 

 

▽ 

이 글을 쓰는 내내 정동을 안내한 고인이 된 생태적지혜연구소 신승철님이 생각났다. 아직은 연구자의 글로 만나는 정동을 노래 부르고, 춤추고, 사랑하는 세상으로 안내하려고 애쓰던 모습이. 그의 글과 책에는 늘 정동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넘쳐났다. 이 글이 내가 먼저 떠난 그에게 보내는 첫 번째 소식(消息)이다. 

 

1) 스피노자의 명제, “우리는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 모른다”가 암시하듯, 정동 연구는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몸의 관점에서 정신(의식)을 설명하려 시도한다. 이는 일상생활의 평범해 보이는 것들 속에 숨겨진 정치적 함의를 찾는 작업으로 연결된다. 느낌은 기존에 ‘감정’ 또는 ‘정서’라 일컫던, 몸과 마음의 이분법 중 한쪽에 치우친 것을 중립화하는 어휘이다. 다시 말해, 느낌은 몸과 마음이 함께 작동하여 일어나며 그 양쪽에 흔적을 남기는 움직임, 즉 정동이다. 이 말은 정동이 단지 뇌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작용이 아니라 우리의 몸 전체의 물질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 편집자 주, 『정동이론』 「옮긴이 후기」 중 발췌